그래블(Gravel)처럼 살고 싶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휴가가 생겼고 그 휴가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했다. 목표는 자전거에 꾸린 짐으로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는 것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장비로는 자전거에 침낭을 꾸리기 힘들어 토픽 프론트 로더를 주문했다. 그리고 평소에 꼭 가지고 싶었으나 가격이 비싸 사보지 못했던 요크의 솔라 페이퍼를 구매했다. 토픽 프론트 로더는 만듦새며 실용성이며 아주 좋은 제품이었다. 실제로 나의 침낭을 자전거에 거치하는데 아주 유용했다. 하지만 요크의 솔라 페이퍼는 활용하기 쉽지 않은 제품이었다. 좀 더 내 삶에서의 활용성을 고민해봐야겠다 싶었다. 솔라 페이퍼를 적극 활용하려면 집밖으로 나서는 일이 많아야겠다. 집 밖이 즐거운 생활을 좀 더 해봐야겠다. 물론 자연스럽게 그리 될 듯하다.
돌고 돌아 목적지는 정선을 가보기로 했다..가 영월로 그리고...
평소 자전거 타기를 게을리 했던 탓에 정선까지는 힘들겠다고 애초에 생각했다. 작년 서울-춘천 왕복 200km 초주검이 되었던 때를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번에는 평소 자전거 출퇴근을 게을리 한 탓에 더더욱 힘들 것이다. 그래서 목표는 영월로 정했다. 영월을 차로 드라이브 했던 기억이 좋았기에 영월까지를 목표로 하고 정선은 차차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려는 역시나 현실이 된다. 40킬로미터를 달리고 있을 때 왼쪽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났다. 멈출 정도는 아니었고 조금씩 달래어 가며 타면 될듯했다. 100킬로미터 언저리 오른쪽 다리도 경련이 올라왔다. 두 다리 모두 달래며 타기로 했다. 하지만 오전 10시가 넘어 집에서 출발한 탓에 충주를 지나 영월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을 때 1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영월를 가기 위한 갈림길에 들어섰을 때 나에게 더이상 가지마라고 붙잡는 푯말을 발견했다.
-공사중 진입금지- 망설이는 척을 했으나 자전거 앞바퀴는 좀 전에 지나왔던 충주로 틀어져 있었다.

잘 곳은 정해지지 않아 찾기만 하면 되었다. 어디서든 잘 곳이 있을 것 같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텐트도 아닌 비비색을 쳐야 하는지라 사람이 없는 공터가 좋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저기여기를 물색하다가 조금 지치려는 찰나에 어느덧 체육공원을 발견하고 들어가고 있었다. 외국인 학생? 노동자들이 배구를 열심히 즐기고 있는 공원이었고 저기 파고라 아래에는 나와 같은 처지 일지 모르는 누군가가 능숙하게 이미 텐트를 자기 집처럼 쳐두었다. 이런저런 여건들이 맘에 들어 여기서 하루 묵기로 했다. 그들의 배구는 해가 졌는데도 그치지 않았다. 나는 가져온 비비색과 침낭 속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뒤척였다.

새벽이 밝아오자 일어나기를 서둘렀다. 역시나 새벽 5시도 안 된 새벽길도 부지런히 산책하는 충주시민들이 있었다. 하룻밤 자고 나서인지 내 집처럼 태연하게 수돗가에서 대강의 세안을 하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밤새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서울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왕복의 거리가 280킬로미터가 넘었다. 이정도면 자전거여행을 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이정도면 됐다.! 장거리도 탔고 노숙도 하고 목표를 이루었다.


결코 복귀 길이 만만치 않았다. 어디서부터인지 체력은 바닥 나 있어서 벤치를 만나면 몇 번을 드러누워 잤다. 그러고도 안 되겠다 싶어 유명해 보이는 도너츠 가게에서 만원어치를 해치웠다. 해치우고도 벤치를 만나서 잠을 잤다. 그러곤 집에 왔다. 후유증이 며칠 갔다. 아픈 곳은 없었으나 체력이 없었다.
그래블처럼 살고 싶다. 늘상 있는 자전거 출근에서도 느끼지만 거친 바닥을 두터운 바퀴가 무심히 훑고 지나갈 때면 마음이 부유해진다. 경쾌하게 로드자전거 페달을 밟는 걸 생각해 보지만 넉넉히 편안하게 밟히는 그래블 자전거를 타고 나면 금세 잊히고 만다. 속도를 높이면 그만큼 위험하니 속편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삶의 매사를 그래블처럼 살고 싶다. 많은 장애물들이 있겠지만 무심히 헤쳐가고 끈질기게 버텨내고 싶다. 나의 그래블을 탈 때면 내가 이걸 왜 사서 타고 있는지 나를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즐거운 나의 자전거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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